전세는 저렴한 주거제도인가, 거대한 사금융인가
전세는 일정한 보증금을 집주인에게 맡기고 계약기간 동안 별도의 월세 없이 주택을 사용하는 임대차 방식이다. 매달 임대료가 빠져나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임차인에게 유리해 보이지만, 경제적으로 전세를 무료 주거라고 보기는 어렵다. 임차인은 거액의 보증금을 집주인에게 제공하고 그 돈으로 얻을 수 있었던 예금이자나 투자수익을 포기한다. 보증금 일부를 대출받았다면 매달 이자도 부담해야 한다.
집주인의 관점에서는 전세보증금이 주택담보대출을 대신하는 자금조달 수단이 된다. 집주인은 금융기관의 까다로운 심사를 받거나 매달 이자를 내지 않고 임차인의 목돈을 활용할 수 있다. 대신 임차인에게 주택 사용권을 제공하고 계약이 끝나면 보증금을 전액 돌려줘야 한다. 전세는 주거계약인 동시에 임차인이 임대인에게 자금을 공급하는 금융거래의 성격을 지닌다.
예를 들어 시가 5억 원인 주택을 전세보증금 3억 5,000만 원을 끼고 매입한다면 집주인이 실제로 투입하는 자금은 1억 5,000만 원까지 줄어든다. 집값이 5억 5,000만 원으로 오르면 자기자본 1억 5,000만 원으로 5,000만 원의 자본이득을 얻는 레버리지 효과가 발생한다. 반대로 주택가격이 4억 원으로 떨어지고 다른 선순위 채권까지 존재한다면 임차인의 보증금이 위험해질 수 있다.
전세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집주인과 임차인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시기가 길었기 때문이다. 주택가격이 장기적으로 상승하던 시기에는 집주인이 보증금 반환 위험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됐고, 임차인은 월세보다 낮은 비용으로 거주하면서 목돈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저성장과 주택가격 변동, 전세사기, 전세대출 증가, 보증기관의 재정 부담이 겹치면서 전세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커졌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전체 임대차 거래 중 월세 비중은 2025년 10월 계약일 기준 60.2%까지 높아졌다. 전세가 당장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임대차시장의 중심이 이미 월세와 보증부월세로 이동하고 있다는 의미다.
가. 전세 제도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경제적 조건
전세와 유사한 계약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지금과 같은 전세가 널리 확산된 시기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된 1970년대 이후다. 당시에는 주택 수요가 빠르게 증가했지만 장기 주택담보대출을 비롯한 주택금융은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다. 집을 사려는 사람은 은행보다 임차인에게서 주택 매입자금을 조달했고, 임차인은 월세를 내는 대신 목돈을 집주인에게 맡겼다.
전세는 이러한 금융 공백을 채워 줬다. 1990년대에는 전체 임대차계약 중 전세 비중이 70%에 육박했지만, 외환위기 이후 금리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면서 전세 비중도 점차 낮아졌다. 집주인이 보증금을 예금하거나 투자해 얻을 수 있는 수익이 줄어들자 보증금만 받기보다 월세를 함께 받으려는 유인이 커졌기 때문이다.
다만 금리와 전세의 관계는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금리가 상승하면 집주인은 보증금을 운용해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어 전세 공급을 선호할 수 있다. 반면 전세대출을 이용하는 임차인의 이자 부담은 증가하기 때문에 전세 수요는 감소할 수 있다. 금리가 하락하면 임차인의 대출 부담은 줄지만 집주인의 보증금 운용수익도 줄어 월세 선호가 강해진다. 결국 전세의 증감은 금리뿐 아니라 전월세전환율, 주택가격 전망, 대출 규제와 보증금 반환 위험이 함께 결정한다.
임차인이 전세를 선호하는 가장 현실적인 이유는 매달 부담하는 비용이 월세보다 낮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전세보증금 3억 원을 자기자금으로 마련하고 예금금리를 연 3%로 가정하면 포기하는 이자는 연간 900만 원, 월평균 75만 원이다. 같은 주택의 월세가 100만 원이라면 전세의 기회비용이 더 낮다. 보증금 일부를 대출받더라도 대출이자가 월세보다 낮다면 전세를 선택할 유인이 생긴다.
문제는 전세자금대출이 확대되면서 전세가 자기자본 중심의 계약에서 대출에 의존하는 계약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KDI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24년까지 전세자금대출 잔액의 연평균 증가율은 18.5%로, 같은 기간 총가계대출 증가율 5.8%를 크게 웃돌았다. 전세대출은 목돈이 부족한 가구의 주거 선택지를 넓혔지만, 높아진 대출 한도가 전세 수요와 전세가격을 끌어올리는 결과도 만들었다.
전세가격이 오르면 집주인은 더 적은 자기자본으로 주택을 구입할 수 있다. 주택담보대출을 규제하더라도 임차인의 전세보증금을 이용하면 규제를 우회해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것이다. 국토연구원 분석에서는 전세가격과 갭투자가 매매가격 상승 및 주택시장 변동성과 연결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당 연구 모형에서는 전세가격이 1% 상승할 때 매매가격이 0.655%, 갭투자가 1% 증가할 때 매매가격이 0.148% 상승하는 관계가 추정됐다. 모든 시기와 지역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수치는 아니지만, 전세보증금이 단순한 임대차 보증금을 넘어 주택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나. 역전세와 전세사기가 드러낸 구조적 한계
전세의 가장 큰 취약점은 계약기간이 끝났을 때 집주인이 보증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집주인은 받은 보증금을 주택 매입, 대출 상환 또는 다른 투자에 사용할 수 있다. 따라서 기존 임차인에게 돌려줄 보증금을 다음 임차인의 보증금으로 마련하는 관행이 널리 형성됐다.
전세가격이 계속 오르거나 유지될 때는 이 구조가 큰 문제 없이 작동한다. 기존 보증금이 3억 원이고 새로운 전세계약을 3억 3,000만 원에 체결할 수 있다면 집주인은 이전 임차인에게 보증금을 반환하고도 여유자금을 확보한다. 반대로 새로운 전세가격이 2억 5,000만 원으로 떨어지면 집주인이 직접 5,000만 원을 마련해야 한다. 이것이 역전세다.
집주인이 여러 채를 같은 방식으로 매입했다면 문제가 더 커진다. 주택 10채에서 각각 5,000만 원의 반환 부족액이 발생하면 필요한 현금은 5억 원으로 늘어난다. 집주인에게 별도의 금융자산이나 대출 여력이 없다면 일부 주택을 급매로 처분해야 한다. 그런데 주택가격마저 보증금보다 낮아지면 집을 팔아도 보증금을 모두 돌려주지 못하는 깡통전세가 된다.
국토연구원은 전세보증금이 단순한 담보가 아니라 집주인에게 제공되는 대출의 성격을 지니지만, 거액의 보증금 활용과 반환에 대한 금융적 규율은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2023년 당시 시장 상황을 바탕으로 한 분석에서는 보증금 반환 지연 위험 가구가 24만 1,000~49만 2,000가구, 온전히 돌려받지 못할 위험이 있는 가구가 2만~4만 2,000가구로 추정됐다. 이는 현재의 피해 가구 수를 뜻하는 통계가 아니라, 주택가격과 전세가격이 급격하게 조정될 때 잠재 위험이 얼마나 넓게 확산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분석이다.
전세보증금 반환보증은 이러한 위험을 줄이는 핵심 장치다.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면 HUG와 같은 보증기관이 임차인에게 먼저 지급하고 집주인을 상대로 채권을 회수한다. 임차인의 생활을 보호한다는 점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제도지만, 모든 위험을 공공 보증으로 해결하는 방식에도 한계가 있다.
보증료가 실제 사고 가능성보다 낮거나 주택의 위험도와 관계없이 비슷하게 책정되면 고위험 계약이 보증제도에 집중될 수 있다. 집주인과 금융기관도 손실을 보증기관이 떠안을 것이라고 기대해 위험한 계약을 충분히 걸러내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 개인 간 계약에서 발생한 손실이 보증기관의 재무 부담으로 이전된다.
반대로 가입 기준을 지나치게 강화하면 보증이 가장 필요한 저가주택 임차인이 보호받지 못하는 문제가 생긴다. 아파트보다 정확한 시세를 확인하기 어려운 다세대·다가구주택은 전세가율이 높고 보증 가입 문턱도 높다. 안전한 주택의 임차인은 낮은 비용으로 보호받지만, 위험한 주택에 거주할 수밖에 없는 저소득 임차인은 보증에서 제외되는 역설이 나타날 수 있다.
KDI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택과 임대인의 위험에 따라 보증료율을 차등화하고, 전세대출보증과 반환보증을 연계하는 방향을 제안했다. 보증기관이 손실을 무조건 떠안는 구조가 아니라 계약 단계에서부터 과도한 전세가와 선순위채권을 걸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다. 전세는 사라질까, 더 안전한 형태로 축소될까
전세가 단기간에 완전히 사라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 임차인에게는 매달 고정적으로 빠져나가는 주거비를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여전히 크고, 집주인에게도 보증금을 활용해 자금을 조달할 유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시세가 비교적 투명하고 전세가율이 낮은 아파트에서는 보증금 미반환 위험이 상대적으로 작아 전세 수요가 유지될 수 있다.
반면 시세 산정이 어렵고 전세가율이 높은 빌라, 다세대·다가구주택에서는 월세화가 더 빠르게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한국은행 자료에서 전용면적 60㎡ 이하 소형 아파트의 전세 비중도 2023년 8월 47.1%에서 2025년 8월 41.6%로 하락했다. 같은 기간 월세 비중은 52.9%에서 58.4%로 높아졌다. 전세에서 완전 월세로 한 번에 이동하기보다 보증금을 일부 낮추고 매달 임대료를 내는 준월세와 반전세가 중간 형태로 확산되고 있다.
따라서 전세의 미래는 소멸보다 축소와 양극화에 가깝다. 시세가 투명하고 담보 여력이 충분한 주택에는 전세가 남고, 보증금 반환 위험이 높은 주택은 월세와 보증부월세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안전한 전세는 희소해지고, 보증 가입이 가능한 주택과 그렇지 못한 주택 사이의 임대 조건도 달라질 수 있다.
전세가 경제적으로 지속 가능하려면 먼저 보증금 반환이 다음 임차인의 보증금이나 지속적인 집값 상승에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 집주인이 자신의 소득과 금융자산, 대출 여력을 통해 보증금을 상환할 능력이 있는지 확인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선순위 근저당과 다른 임차인의 보증금을 모두 합산해 주택가격 대비 채무 비율을 계산해야 하는 이유다.
두 번째는 전세가격의 적정성을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거래량이 적은 신축 빌라처럼 객관적인 시세가 불분명한 주택은 감정가나 분양가를 부풀려 전세보증금을 높일 가능성이 있다. 실거래가와 공시가격뿐 아니라 같은 건물의 다른 계약, 선순위 임차보증금과 집주인의 다주택 보유 현황까지 연결해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세 번째는 반환보증을 계약 이후의 피해구제 수단이 아니라 계약 이전의 위험심사 장치로 바꿔야 한다. 전세가율이 일정 수준을 넘는 계약은 보증료를 높이고, 과도하게 높은 계약은 시장 진입 자체를 제한하는 방식이다. 국토연구원은 전세가율 60~90% 구간의 반환보증 가입을 의무화하고 90%를 초과하는 고위험 계약은 제한하는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다만 저소득층이 보증료 부담 때문에 보호에서 제외되지 않도록 소득에 따른 지원을 함께 설계해야 한다.
보증금을 전액 외부기관에 예치하는 에스크로 방식도 대안으로 거론된다. 하지만 이를 즉시 전면 도입하면 집주인이 전세를 공급할 이유가 크게 줄고, 월세 전환이 급격히 진행될 수 있다. 임차인은 보증금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지만 월세 부담이 증가하는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일정 비율의 반환준비금부터 단계적으로 예치하고, 나머지 자금에는 위험 기반 보증과 임대인 상환능력 심사를 적용하는 방식이 현실적이다.
월세화가 금융안정에는 긍정적이라고 해서 모든 가구에 유리한 것도 아니다. 한국은행 시산에서는 아파트 전세보증금의 10%를 월세로 전환한다고 가정했을 때 소득 1분위 가구의 소득 대비 주거비 비중이 17.4%에서 21.2%로 상승했다. 월세로 전환한 가구는 전세를 유지한 가구보다 신용대출 사용액도 더 많이 증가한 것으로 분석됐다. 전세 위험을 줄이는 과정에서 저소득 가구의 소비 여력과 주거 안정성이 악화될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전세대출과 보증을 줄이는 정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월세 세액공제와 주거급여, 장기 공공임대, 민간 장기임대 공급을 함께 확대해야 한다. 전세를 무조건 유지하거나 없애는 방식이 아니라 안전한 전세, 감당할 수 있는 월세, 안정적인 공공임대라는 여러 선택지를 동시에 마련해야 한다.
전세의 지속 가능성은 집값 상승이 아니라 반환 능력에 달려 있다
전세는 한국의 주택금융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에 집주인에게는 주택 구입자금을, 임차인에게는 비교적 낮은 주거비를 제공하며 성장했다. 집값과 전세가격이 장기적으로 상승하는 동안에는 새로운 임차인의 보증금으로 기존 보증금을 돌려주는 구조도 큰 문제 없이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세가격이 하락하면 이 구조의 약점이 즉시 드러난다. 집주인은 보증금 차액을 마련해야 하고, 주택가격까지 떨어지면 주택을 매각해도 보증금을 반환하지 못할 수 있다. 여기에 전세대출과 공공 보증이 무분별하게 확대되면 전세가격과 매매가격을 밀어 올리고, 손실은 보증기관과 사회 전체로 이전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고 전세를 갑자기 없애면 월세 수요가 급증하고 저소득층의 주거비 부담이 커진다. 따라서 현실적인 방향은 전세의 전면 폐지가 아니라 고위험 전세를 줄이고 안전한 전세만 남기는 것이다. 시세가 투명하고 전세가율이 낮으며 집주인이 독립적인 반환 능력을 가진 계약은 계속 유지될 수 있다. 반면 다음 임차인의 보증금과 주택가격 상승에 의존하는 전세는 경제적으로 지속 가능하다고 보기 어렵다.
앞으로 전세 제도를 평가하는 기준도 전세 물량이 얼마나 많은가에서 보증금이 얼마나 안전하게 반환될 수 있는가로 바뀌어야 한다. 임대인의 채무와 상환능력 심사, 적정 전세가격 평가, 위험별 보증료, 부분적인 보증금 예치, 저소득 월세가구 지원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
결국 전세 제도는 사라지기보다 규모가 줄고 형태가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안전성이 높은 아파트 전세와 보증부월세가 공존하고, 전세가율이 높은 비아파트 시장에서는 월세 전환이 계속될 것이다. 전세의 경제적 지속 가능성은 집값이 계속 오른다는 믿음이 아니라 집값이 하락하더라도 임차인의 보증금을 돌려줄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데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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