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안의 이익을 우선할 때, 세계는 어떻게 요동치는가

21세기 초반까지 세계 경제는 자유무역과 글로벌 공급망 확대를 중심으로 빠르게 통합되었습니다. 국경을 초월한 자본·노동·기술의 이동은 국가 간 상호 의존을 심화시켰고, 이를 통해 저비용·고효율의 생산과 소비 체계가 가능해졌습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이러한 흐름에 급격한 균열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바로 자국 우선주의(Economic Nationalism)의 부상입니다.
자국 우선주의는 자국 산업 보호, 고용 창출, 경제적 주권 회복을 이유로 해외 의존도를 낮추고, 내부 시장의 자율성을 강화하려는 정책 방향을 말합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America First', 영국의 브렉시트,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 강화, 중국의 공급망 내재화 등이 이러한 흐름에 속합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지정학적 리스크, 팬데믹, 기술패권 경쟁, 환경 규제 강화 등과 맞물리며, 세계화로 구축된 기존 질서를 흔들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자국 산업 보호와 회복 탄력성을 높이는 긍정적 측면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역 갈등, 공급망 단절, 글로벌 성장 저하라는 부정적 파장을 낳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자국 우선주의의 개념과 주요 정책 동향을 살펴보고, 이러한 흐름이 글로벌 경제에 어떤 구조적 충격과 재편을 유발하는지를 분석합니다. 나아가 경제 민족주의와 세계화가 충돌하면서 새로운 국제 경제 질서의 가능성까지 함께 전망하고자 합니다.
1.자국 우선주의의 개념과 확산 배경 - 경제 민족주의의 귀환
자국 우선주의(Economic Nationalism)는 한 국가가 자국의 산업과 고용, 경제 주권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글로벌 경제 질서보다 자국 내 이익 보호에 집중하는 경제 전략을 말합니다. 이는 단순한 보호무역주의나 일시적 경제 개입을 넘어, 경제 정책 전반을 국가 중심의 전략적 사고로 재편하려는 움직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경제 민족주의는 새로운 개념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도 대공황, 전후 복구기, 오일쇼크 시기 등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이 높아질 때마다 고개를 들었고, 국내 산업 보호·자국민 우선 고용·무역 통제 강화 등으로 나타나 왔습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지정학적 위기, 팬데믹, 기술 패권 경쟁, 탈세계화 흐름 등과 결합해 그 영향력이 훨씬 광범위하고 구조적이기 때문입니다.
1.1 글로벌화의 피로와 불균형의 반작용
20세기 후반 이후 세계는 자유무역과 세계화(globalization)를 통해 급속한 경제 성장과 시장 확장을 경험했습니다. 특히 WTO 출범 이후 다자간 무역 협정은 관세 장벽을 낮추고 공급망을 글로벌화하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글로벌화는 동시에 국가 간·국내 계층 간 불균형을 심화시키는 부작용도 동반했습니다.
· 선진국 내 제조업 공동화와 일자리 유출
· 개도국 내 수출 중심 성장의 편중 구조
· 대기업 중심의 이윤 집중과 중소기업 고사
이러한 현실은 일부 국가에서 중산층의 분노, 지역 격차, 노동시장 붕괴로 나타났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고용을 지키려는 정치적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했습니다.
1.2 지정학적 리스크와 공급망의 전략화
2018년 이후 미중 무역전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갈등 등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경제는 더 이상 '비정치적 영역'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특히 반도체, 희토류, 식량, 에너지 등 전략물자의 공급망이 무기화되는 현상은 각국으로 하여금 공급망의 내재화와 자립적 체계 구축을 요구하게 만들었습니다.
· 미국의 CHIPS and Science Act: 자국 반도체 산업에 대규모 보조금 지원
· 유럽연합의 Strategic Autonomy 정책: 핵심 기술과 에너지 자립 목표
· 중국의 Made in China 2025: 첨단 제조 분야에서의 자립 강화
이러한 정책들은 글로벌 협력보다 국가 주도의 산업 육성과 통제 강화에 초점을 두며, 경제 민족주의를 제도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3 팬데믹과 경제 주권의 재조명
코로나19 팬데믹은 전 세계에 공급망 단절의 위기를 체감하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마스크, 백신, 의료 장비 등 필수 품목조차 해외 수입에 의존했던 국가들은 '경제 주권'의 중요성을 절실히 인식하게 되었고, 이후 자국 내 생산을 장려하거나 필수품목의 수출을 통제하는 등 내부 중심의 전략을 강화하게 됩니다.
팬데믹은 단순한 공중보건 위기가 아니라, 경제의 전략적 자립성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계기였으며, 이에 따라 자국 우선주의는 더욱 정당성을 얻게 됩니다.
1.4 정치적 민족주의와 결합된 경제 이념
자국 우선주의는 단순한 경제 전략이 아니라 정치적 민족주의와 긴밀하게 연결된 담론입니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Make America Great Again”은 대표적인 사례로, 경제적 민족주의와 포퓰리즘 정치가 결합되면서 글로벌화에 대한 대중적 저항을 강하게 자극했습니다.
또한 유럽의 브렉시트(Brexit), 프랑스 극우 세력의 '경제 주권' 강조, 한국 내 공급망 리쇼어링 정책 등에서도 정치와 경제가 민족주의라는 프레임 속에서 만나는 양상이 점차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곧 경제가 더 이상 시장만의 영역이 아니며, 안보와 정치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전략적 수단임을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자국 우선주의는 단기적 위기 대응 전략이 아니라, 지정학·정치·경제를 통합하는 새로운 질서 전환의 신호탄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특히 세계화로 인한 내부 불균형, 전략 자원의 무기화, 팬데믹 이후의 공급망 재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자국 중심의 경제 전략은 이제 정책의 예외가 아닌 표준으로 자리잡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은 단순히 국가 이익의 보호를 넘어, 글로벌 협력 구조 전체를 재편하게 만들며 경제 블록화와 무역 갈등의 가능성도 함께 높이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향후 글로벌 경제는 더욱 복잡하고 다극적인 재조정의 시기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2.주요국의 자국 중심 정책 사례 - 미국, 유럽, 중국의 전략 비교

자국 우선주의는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각국의 구체적인 산업·무역·기술 정책으로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미국, 유럽연합, 중국은 모두 자국 중심 전략을 채택하고 있지만, 정책의 동기와 수단, 목표 설정 방식에서는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이 장에서는 세 주체의 대표적 정책을 통해 자국 우선주의가 어떻게 서로 다른 경로로 구현되고 있는지를 비교합니다.
2.1 미국: 안보와 기술패권을 중심으로 한 산업 재편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는 국가 안보와 기술패권 확보를 핵심 목표로 합니다. 트럼프 행정부 시기의 America First는 관세 인상과 무역 압박이라는 직접적 수단을 사용했다면, 바이든 행정부 이후에는 보조금과 규제, 동맹 재편을 결합한 보다 정교한 방식으로 진화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CHIPS and Science Act와 Inflation Reduction Act(IRA)입니다. 이들 정책은 반도체, 배터리, 전기차, 친환경 에너지 등 전략 산업에 대해 대규모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제공하는 대신, 미국 내 생산과 투자를 요구합니다. 이는 글로벌 기업들로 하여금 미국 현지 생산을 선택하도록 유도하며, 공급망을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는 효과를 낳고 있습니다.
미국 전략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자유무역 원칙을 유지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술과 안보를 이유로 강력한 선택적 보호를 시행합니다.
둘째, 중국을 명확한 경쟁자로 설정하고 첨단 기술의 이전과 접근을 제한합니다.
셋째, 동맹국과의 협력을 강조하지만, 그 협력은 미국 중심의 가치 사슬 참여를 전제로 합니다.
2.2 유럽연합: 전략적 자율성과 규범 중심의 보호
유럽연합(EU)의 자국 중심 전략은 미국이나 중국과 달리 노골적인 보호무역보다는 '전략적 자율성(Strategic Autonomy)'이라는 개념으로 전개됩니다. EU는 오랫동안 자유무역과 다자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해왔지만, 최근에는 에너지 위기와 지정학적 리스크를 계기로 핵심 산업의 자립 필요성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EU의 전략은 반도체, 배터리, 에너지, 디지털 인프라 등 필수 산업을 유럽 내에서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데 초점을 둡니다. 이를 위해 유럽 반도체법(EU Chips Act), 배터리 규제 강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유럽 전략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직접적인 관세 장벽보다는 규제와 표준을 통한 간접적 보호를 선호합니다.
둘째, 환경·노동·인권 기준을 강화함으로써 유럽 시장 진입 자체를 선별합니다.
셋째, 회원국 간 이해관계 조율이 필수적이어서 정책 추진 속도는 상대적으로 느리지만, 제도화되면 강력한 구속력을 가집니다.
즉, 유럽의 자국 우선주의는 '배제'보다는 규범을 통해 질서를 재편하는 방식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2.3 중국: 국가 주도형 자립 전략과 내수 중심 전환
중국의 자국 중심 정책은 세 국가 중 가장 명확한 국가 주도형 경제 민족주의로 평가됩니다. 중국은 미중 갈등과 기술 제재를 계기로, 글로벌 의존도를 낮추고 핵심 기술과 산업의 완전한 내재화를 최우선 과제로 설정했습니다.
대표적인 전략이 Made in China 2025, 쌍순환 전략(Dual Circulation)입니다. 쌍순환 전략은 수출 중심의 외순환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내수 시장과 국내 기술을 기반으로 한 내순환을 강화하겠다는 방향을 명확히 합니다. 이는 반도체, AI, 통신, 전기차, 배터리 등 전략 산업에서 국산화 비율을 빠르게 끌어올리는 정책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중국 전략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정부의 직접 개입과 자원 배분이 강력합니다.
둘째, 외국 기업에는 시장 접근을 허용하되 기술 이전과 현지화를 사실상 요구합니다.
셋째, 정치·외교 리스크가 경제 전략에 직접 반영되는 구조로, 경제와 안보의 경계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2.4 세 국가 전략의 공통점과 차이점
미국, 유럽, 중국은 모두 자국 우선주의를 채택하고 있지만, 공통점과 차이점은 분명합니다. 공통적으로는 핵심 산업과 기술을 국가 안보의 영역으로 인식하고, 글로벌 의존도를 줄이려는 방향을 취합니다. 그러나 실행 방식은 크게 다릅니다.
미국은 보조금과 동맹 압박을, 유럽은 규제와 표준을, 중국은 국가 주도 내재화를 핵심 수단으로 활용합니다. 이 차이는 향후 글로벌 기업과 중견국가들이 어떤 시장을 중심으로 공급망을 재편할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자국 우선주의는 더 이상 특정 국가의 예외적 선택이 아니라, 주요 경제권 모두가 채택한 구조적 전략이 되었습니다. 미국, 유럽, 중국의 정책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지만, 결과적으로는 글로벌 경제를 블록화하고, 선택과 분기를 강요하는 환경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글로벌 경제는 과거의 단일한 자유무역 체제가 아닌, 다층적·다극적 경제 질서로 재편되고 있으며, 이는 향후 국제 무역과 투자, 산업 전략 전반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3.글로벌 경제에 미치는 영향 - 무역, 공급망, 성장률의 변화

자국 우선주의의 확산은 개별 국가의 경제 전략에 그치지 않고, 전 세계적인 무역 흐름, 공급망 구조, 글로벌 성장률에 중대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특히 자국 중심의 정책들이 동시에 여러 나라에서 시행될 경우, 이는 글로벌 경제 시스템의 근본적 재편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자국 우선주의가 국제경제에 미치는 구체적인 영향들을 세 가지 축에서 분석합니다.
3.1 글로벌 무역 감소와 다자주의의 약화
자국 우선주의는 기본적으로 해외 시장 개방보다 자국 산업 보호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자유무역 확대를 지향하는 WTO 체제와 근본적으로 충돌합니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 관세 인상 및 비관세 장벽의 확산: 미국과 중국 간의 무역전쟁은 대표적 사례이며, 이후 세계 각국이 무역을 정치·외교 수단으로 활용하는 경향이 뚜렷해졌습니다.
· 양자·소지역 무역 협정의 증가: 다자간 협정(WTO)의 위축과 함께, 특정 국가 또는 지역 간에 배타적인 협정이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 전략 품목의 수출 제한: 반도체, 백신, 식량, 희토류 등 일부 핵심 자원의 수출 제한 조치는 세계 무역의 예측 가능성을 낮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결국 세계 무역의 성장 속도를 둔화시키고, 특히 무역 의존도가 높은 개발도상국의 성장 여력을 크게 위축시킵니다. 글로벌 경제가 상호의존보다 블록화(blockization)되는 흐름이 강화되며, 이는 다자주의와 협력을 기반으로 했던 국제 경제 질서의 약화를 의미합니다.
3.2 공급망 재편과 비용 상승
팬데믹과 지정학 리스크를 거치며, 세계는 '효율 중심'에서 '회복탄력성 중심'의 공급망 전략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자국 우선주의는 이를 가속화하며, 기존의 글로벌 공급망 체계를 다음과 같이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 리쇼어링(Reshoring): 생산 거점을 자국으로 되돌리는 전략으로, 특히 미국과 일본 기업들이 활발하게 도입하고 있습니다.
· 니어쇼어링(Nearshoring)과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 지정학적으로 안정적인 인접국이나 우호국에 공급망을 이전하는 방식입니다.
· 중간재 공급의 단절 가능성 확대: 특정 국가의 자원 또는 기술에 대한 의존이 높을 경우, 정책적 갈등이 공급망 전체를 위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공급망 재편은 기업에게 생산비 증가, 조달 불확실성, 재고 비용 상승이라는 부담을 안깁니다. 특히 전기차, 반도체, 에너지 같은 고부가가치 산업일수록 글로벌 공급의 복잡성과 비용이 급증하고 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소비자 물가 상승과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3.3 글로벌 성장률의 저하와 불균형 확대
무역 감소와 공급망 왜곡은 결국 전 세계적인 성장률 둔화를 야기합니다. 세계은행(WB)과 IMF는 자국 우선주의가 강화될 경우, 2030년까지 글로벌 GDP의 연평균 성장률이 약 0.2~0.5%포인트 하락할 수 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또한 문제는 단순한 성장 둔화에 그치지 않고, 국가 간·지역 간 불균형을 심화시킨다는 점에 있습니다.
· 신흥국은 외자 유입과 수출 의존도가 높아 타격이 더 큽니다.
· 기술·에너지·식량 자립도가 낮은 국가는 경제적 종속 상태가 더욱 악화될 수 있습니다.
· 노동력과 자원 기반은 있지만 기술과 자본이 부족한 국가들은, 글로벌 가치사슬에서 배제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즉, 자국 우선주의는 세계 경제를 '강한 국가 중심의 경쟁 구도'로 전환시키며, 약소국의 성장 기회를 구조적으로 축소시킬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다국적 기업들의 투자 전략도 과거의 개도국 중심에서 정치·경제 안정성이 높은 지역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자국 우선주의는 단지 각국의 산업 보호를 위한 정책적 선택이 아니라, 글로벌 경제의 연결성과 성장 엔진 전체에 구조적 영향을 미치는 변화입니다. 특히 무역 자유화와 효율 중심의 공급망이 흔들리면서, 세계 경제는 더 느리게, 더 불균형하게 성장하는 구조로 재편되고 있습니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자국 내 고용 창출과 전략 산업 보호라는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글로벌 협력 체계의 붕괴, 신흥국 성장 정체, 기술 확산의 둔화 등으로 이어질 위험이 큽니다. 따라서 자국 우선주의의 흐름을 무조건적인 배척이 아닌, 다층적 글로벌 협력의 조정 구조로 통합해가는 정치적 리더십과 제도 설계가 더욱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4.세계화의 재구성과 미래 전망 - 충돌에서 조정으로의 전환 가능성

자국 우선주의가 세계 경제 질서의 새로운 표준처럼 자리잡으면서, 기존의 무조건적 세계화 모델은 분명한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세계화의 종말을 의미하기보다는, '재구성'과 '재조정'의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기술, 안보, 가치, 기후 등 다양한 요소들이 얽히며, 세계화는 이제 단일한 경제 논리가 아닌 복합적 조건 속의 다층적 세계화(Multi-layered Globalization)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4.1 세계화의 일방향 흐름은 끝났다
1980년대 이후 세계화는 주로 무역 자유화, 자본 개방, 생산의 글로벌 분업이라는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특히 WTO 체제와 자유무역협정(FTA)의 확산은 다자주의에 기반한 질서를 공고히 했습니다. 그러나 팬데믹과 지정학적 충돌, 기술 패권 경쟁, 자원 안보 이슈는 이 질서를 약화시켰고, 효율 중심의 글로벌 가치사슬은 리스크 분산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습니다.
즉, 세계화는 더 이상 비용 최소화만을 추구하는 '무경계의 흐름'이 아니며, 각국의 전략적 계산과 정치적 고려가 더해진 조건부 세계화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4.2 선택적 연계와 지역화의 강화
자국 우선주의의 확산은 기존의 전방위적인 글로벌 통합 대신, 지역 중심의 블록화와 신뢰 기반 파트너십 중심의 세계화로 재편되고 있습니다. 이른바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 니어쇼어링(Near-shoring) 전략이 이를 대표합니다.
· 미국은 북미 지역, EU는 유럽 내 혹은 지리적으로 인접한 국가와의 공급망 강화를 추구하며,
· 중국은 동남아,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등으로 공급망 다변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세계화를 배제의 흐름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치와 안보를 공유하는 국가 간에는 더 밀접한 통합을 유도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즉, 세계화는 단절이 아닌 경계 재설정을 통해 진화하고 있는 셈입니다.
4.3 기술, 기후, 가치가 재편을 이끄는 핵심 요소
세계화의 재구성에서 특히 주목할 세 가지 축은 기술, 기후, 가치입니다.
· 기술: 디지털 전환, 인공지능, 반도체 기술 등은 각국의 주권적 통제를 강화하는 동시에, 특정 국가에 기술 의존을 높이는 구조를 만들어냅니다. 이는 기술 블록화 현상을 유발하며, 디지털 경제의 분할 가능성까지 제기됩니다.
· 기후: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ESG 기준, 친환경 산업 육성 정책은 환경 기준을 중심으로 한 무역의 새로운 장벽을 만들고 있습니다. 동시에 '녹색 산업의 연합'이라는 형태로 협력의 지형도 바꾸고 있습니다.
· 가치: 인권, 노동, 데이터 주권 같은 민주주의적 가치 기준이 글로벌 규범을 결정하는 데 점차 큰 역할을 하게 되면서, 규범의 동질성이 없는 국가 간 갈등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국가 간 이해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지만, 새로운 형태의 연합과 제도적 조정의 가능성도 열어주는 조건이 됩니다.
4.4 충돌에서 조정으로: 새로운 글로벌 질서의 가능성
중장기적으로 세계화는 '과거로의 복귀'가 아닌, 보다 다극적이고 탄력적인 체계로의 전환이 유력합니다. 이는 기존의 WTO 중심 다자주의와 완전한 자국주의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하이브리드형 질서입니다.
· 양자·소다자 협정의 제도화: CPTPP, IPEF, RCEP 등은 이러한 움직임의 대표 사례입니다. 이는 완전한 자유무역은 아니지만, 정치적 신뢰를 기반으로 한 질서 있는 교환을 가능케 합니다.
· 글로벌 규범의 다양성 인정: 보편적 기준을 강제하기보다, 지역별 상황에 맞춘 협상과 합의가 주류가 될 수 있습니다.
· 포용적 성장과 회복탄력성 강조: 공급망, 식량, 에너지 등 전통적 경제 요소뿐 아니라, 사회적 지속가능성에 대한 투자가 글로벌 협력의 기준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자국 우선주의는 세계화의 종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조건 아래에서 어떻게 조정과 공존의 길을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시험대입니다. 이는 단순히 경제적 전략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사회의 신뢰 회복과 규범 재구성이라는 정치·윤리적 과제이기도 합니다.
자국 우선주의 시대, 재구성되는 세계화의 균형 감각

자국 우선주의의 부상은 단순한 보호무역이나 일시적 정치 구호를 넘어, 세계 경제 구조 전반을 흔드는 거대한 흐름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미국, 유럽, 중국 등 주요국이 각각의 방식으로 자국 중심의 전략을 펼치면서, 우리는 '무조건적 자유무역'이라는 과거의 세계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국가 간 무역은 위축되고, 공급망은 재편되며, 글로벌 성장률은 둔화되고 있습니다. 특히 기술, 안보, 자원, 환경 같은 비경제적 요소들이 경제정책과 연결되면서, 세계 경제는 점점 더 정치화되고 다극화된 질서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반드시 '세계화의 붕괴'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는 세계화의 재구성 과정에 서 있는 것입니다. 완전한 단절이 아닌, 가치·안보·기술을 기준으로 한 새로운 연계와 조정의 시대로 전환되고 있으며, 이는 다자주의가 후퇴하는 대신 양자 및 지역 협력이 확대되는 방향으로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글로벌 경제는 과거처럼 일률적인 규칙이 지배하는 공간이 아니라, 여러 층위의 제도와 블록, 가치 기준이 중첩되는 복합적 질서로 나아갈 가능성이 큽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단일한 해법보다는 국가 간 협력과 조정, 제도적 신뢰를 기반으로 한 유연한 대응 능력이 중요해집니다.
자국 우선주의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지만, 그 안에서도 우리는 지속 가능한 공존의 원칙과 글로벌 조정 메커니즘을 모색해야 합니다. 경쟁과 충돌의 시기를 지나, 새로운 질서 아래에서 연결과 자율, 효율과 회복탄력성의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찾는 것. 그것이 이 시대의 경제 전략에 주어진 과제이며, 국제사회의 공동 책임이기도 합니다.